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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옛 기억

2012/07/07 -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 태종 때 이궁(離宮: 피서, 피한 등의 목적, 행궁)으로 지어졌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궁'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이궁이었지만, 성종 이후 이 곳에서 나랏일을 돌보는 일이 많아졌다.

 

 

 임진왜란 이후 한양의 궁들이 모두 불에 탔으나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고 창덕궁을 재건해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곳)으로 쓰였다.

 

이 밖에도 인조반정이나 부주의로 인한 화재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여러 차례 화재와 그에 따른 재건으로 처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1991년부터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췄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가. 돈화문

 

▲ 돈화문 - 창덕궁의 정문, 창덕궁이 1405년 지어지고, 그로부터 7년 뒤, 이 문이 완공됐다. 왕의 행차가 있을 때만 개방하고, 신하들은 서쪽 금호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나. 인정전

 

▲ 진선문, 인정전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 인정문. 인정전으로 가는 입구이다. 뒤에 중층 전각이 보이는데, 그것이 인정전이다.

 

 

▲ 인정전 - 창덕궁의 주요 전각.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의 큰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서 행사가 거행됐다.

 

 

▲ 품석(品石) - 관리들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제 위치를 표시하였다. 동쪽에는 문반(비군사직), 서쪽에는 무반(군사직) 품석이 위치해있다.

 

 

 

 

▲ 인정전 내부를 들여다보면, 샹들리에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 고종 때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전기와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뭔가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아닌 것 같아 애매하다.

 

 

▲ 역시 중심 전각답게 화려하고 웅장하다. 경복궁 근정전 만큼은 아닐지라도.

 

 

 

나. 선정전

 

 

▲ 편전(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집무실 - 便殿)이며, 선왕을 3년간 모시기 위한 혼전(魂殿)으로 쓰였다.

 

 초기에는 '조계청'이었으나, 1461년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라는 의미로 선정전이 됐다. 기와를 보면 알겠지만 청기와다. 궁궐에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

 

 

 

 

 

▲ 천장 문양

 

 

 

 

 

 

다. 희정당

 

왕이 가장 많이 머무른 건물. 건립 초기 '숭문당'으로 불리다가, 1496년 연산군 2년에 희정당으로 바뀌었다. 선정전이 비좁고, 선왕들을 모시는 혼전(魂.殿)으로 쓰이면서, 이곳에서 머물게 됐다.

 

 

 

 

▲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재건하였는데,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강녕전과도 그 모습이 다르고, 창덕궁을 그린 '동궐도'에서의 희정당과는 더더욱 다른, 전혀 다른 건물이 됐다.

 

 

 

▲ 희정당과 대조전 입구는 이처럼 연결되어 있다. 사진 왼쪽이 대조전 입구, 오른쪽이 희정당.

 

 

▲ 재건하면서 내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졌다.

 

 

 

 

 

 

라. 대조전

 

 

 

▲ 대조전의 모습. 왕비의 공간이었으며, 대조전은 여러 건물을 감싸고 있다.

 

 

▲ 그 가운데 흥복헌이라고, 대조전 왼쪽(우리가 보면 오른쪽)에 붙어있는데, 이곳이 경술국치가 결정된 현장이다.

 

 

▲ 대조전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됐다. 이 역시 1917년 불에 타면서,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지었다.

 

 

 

▲ 대조전에서 왼쪽의 작은 문을 지나면 경훈각이 보이는데, 이곳은 경훈각 옆에 주방으로 보이는 건물. 창문 틈새로 퀴퀴한 냄새가 온다. 전통 전각에서는 맡을 수 없는 불쾌한 냄새다.

 

 

 

 

▲ 여기가 경훈각.

 

 

 

▲▼ 대조전 뒤편.

 

 

 

 

 

 

 

 

 

마. 성정각

 

▲ 성정각은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내의원으로 쓰였다. 단층에 복층 누(樓, 다락)가 붙어 있다.

 

▲왼쪽부터 '칠분서', '삼삼와(6각 누각)', '승화루'가 차례로 보인다. 복도로 연결되어 독서실로 활용되었다.

 

이 건물은, 성정각에서 나와 공터에서 볼 수 있는데, 사실 성정각과 그 공터(중희당 터, 왕세자 거처),

 

그리고 사진에 보이는 이 곳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바. 낙선재

 

 

 

▲ 헌종이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 아내)으로 맞이하면서, 1847년 낙선재, 이듬해 석복헌을 지었는데,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및 사랑채였다. 그리고 경빈의 처소는 석복헌이었다. 위에 보이는 건물이 낙선재.

 

▲ 낙선재 옆 누각을 통해 바라본 내부

 

 

▲ 낙선재 위로 보이는 상량정.

 

 

 

▲ 석복헌. 낙선재 바로 옆에 있으며, 경빈의 처소.

 

▲ 낙선재와 선복헌이 이 '수강재' 옆에 나란히 지어졌는데, 수강재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처소였다.

 

 

 

 

 

 

 

 

▲ 낙선재 입구

 

 

사. 구(舊) 선원전

 

▲ 선전원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1921년 新 선원전을 후원에 지었고, 이곳은 폐허가 됐다.

이 선원전은 지금까지 그대로 있고, 나머지 건물들은 신 선원전이 지어진 이후 없어졌다가 2005년 복원이 됐다.

 

 

▲ 선원전 옆 양지당. 어재실(임금이 능(陵)이나 묘(廟)에 들를 때 잠시 머무르는 곳)이며, 선원전 입구에 들어가면 바로 보인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선원전이 보인다.

 

 

 

▲ 선원전 옆, 궐내각사 사이로 흐르는 금천(禁川: 궁궐이 안과 밖의 경계 역할을 한다). 정작 물은 별로 없다. 날이 더워서 그나마 있던 물도 다 말라버렸다.

 

 

아. 궐내각사

 

▲ 원래 관청이 궐 밖에 있지만, 가까이서 임금을 돕기 위해 궐내에 세웠다. 위에 보이는 건물은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와 함께 있었고,

 

특히 규장각은 정조 때 역대 왕들의 기록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개혁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정조가 관심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이 세 곳이 단순 도서관이 됐으며, 여기 있던 도서들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가져갔고, 건물을 다 헐어버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바꿔버렸다. 지금 남은 규장각은 2000년 ~ 2004년에 복원된 것.

 

 

 

▲ 검서청,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 검서청 옆 금천

 

▲ 검서청 서까래로 금천에서 반사된 햇빛이 비쳤다.

 

▲ 검서청에서 그 뒤편으로 규장각, 검서청으로 들어오는 문이 보인다.

 

▲ 검서청 내부

 

 

 

 

# 창덕궁의 다른 풍경

 

▲ 이름 모를 건물. 잔디밭 출입 금지라 망원으로 당겨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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